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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웅


대부분의 판타지 이야기는 문고리를 당기면서 시작한다. 옷장 문을 열거나(나니아 연대기―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엄청나게 자그마한 문을 열고(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그도 아니면 암호를 말해 숨겨진 문을 찾아 여는 방식이다(해리포터―비밀의 방). 일상에서 상상의 세계로 내보내주는 입구는 이와 같이 표현된다. 그리고 대개 이 문들은 일상적인 곳에 위치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치곤 한다. 판타지 세계는 어쨌거나 그 세계로의 진입을 간절하게 상상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아직 모르는 ‘비밀’로 간주해 파헤치고, 거기에 대해 꼬리 물어 상상할 줄 아는 소수만이 그 문을 발견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와 같은 판타지 공간이 꼭 현실의 반대급부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만이 아는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공간도 예외가 아니라서 실제 집 안에 남모르는 비밀의 공간을 숨겨 넣곤 하는 것이다.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필요한 기능에 맞추어 방을 나누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이며 소개되는데, 이를 거부하고 다용도실이나 창고와 같은 형식적인 이름조차도 붙이지 않은 ‘이름 없는 공간’들이 더러 발견되는 건 그 이유에서다. 분명히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름도, 심지어 방 자체도 아예 없다시피 지워져버린 ‘이름 없는 공간’은 그 집의 판타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집 속에서 보물을 찾아야 한다면 서재 뒤를, 다락방을 노리는 게 빠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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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효진, <낙원아파트>, 펜드로잉, CG color, 2012


어느 누구보다 욕망 판타지가 강하고, 실제로 구현할 능력까지 겸비할 권력자들의 공간은 이와 같은 비밀의 방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죽음을 강하게 의식하던 이집트 파라오들이 피라미드에 수없이 만들어둔 비밀의 방이나, 19세기 호화로운 궁궐 속에서 발레리나들이 춤을 추던 연회장 건너편에 공연을 마친 무용수들과 귀족들이 난교파티를 즐기던 비밀 공간처럼 말이다. 자신의 숭고한 죽음을 망치려는 도굴꾼들에게 대처하기 위해, 그리고 공연이라는 겉치레 뒤에서 아름다운 무용수들과 유흥을 즐기겠다는 귀족들의 욕망은 이러한 ‘비밀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소수의 권력자와 창작자가 구축한 비밀의 방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일반 사람들에게도 어떤 판타지 세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어떤 이상적인 공간을 구축하거나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모험심을 자극하는 세계관은 아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으로 발현한 혼자만의 비밀의 방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기억과 감정에 따라 일상 어느 공간도 이상화할 수 있다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이 이를 짚고 있다. 꼭 이름과 형상이 일상 건너편으로 숨겨져야만 기능할 수 있던 비밀의 방과 달리, 굳이 남에게 숨겨야 한다는 위기의식 없이 나 홀로 어떤 이상세계를 만들어볼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말해선 안 된다는 비밀의 성질을 강조하기보다 나는 말할 수 있다는 관찰의 성질이 여기에서는 두드러진다


어느 누구보다 욕망 판타지가 강하고, 실제로 구현할 능력까지 겸비할 권력자들의 공간은 이와 같은 비밀의 방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죽음을 강하게 의식하던 이집트 파라오들이 피라미드에 수없이 만들어둔 비밀의 방이나, 19세기 호화로운 궁궐 속에서 발레리나들이 춤을 추던 연회장 건너편에 공연을 마친 무용수들과 귀족들이 난교파티를 즐기던 비밀 공간처럼 말이다. 자신의 숭고한 죽음을 망치려는 도굴꾼들에게 대처하기 위해, 그리고 공연이라는 겉치레 뒤에서 아름다운 무용수들과 유흥을 즐기겠다는 귀족들의 욕망은 이러한 ‘비밀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소수의 권력자와 창작자가 구축한 비밀의 방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일반 사람들에게도 어떤 판타지 세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어떤 이상적인 공간을 구축하거나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모험심을 자극하는 세계관은 아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으로 발현한 혼자만의 비밀의 방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기억과 감정에 따라 일상 어느 공간도 이상화할 수 있다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이 이를 짚고 있다. 꼭 이름과 형상이 일상 건너편으로 숨겨져야만 기능할 수 있던 비밀의 방과 달리, 굳이 남에게 숨겨야 한다는 위기의식 없이 나 홀로 어떤 이상세계를 만들어볼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말해선 안 된다는 비밀의 성질을 강조하기보다 나는 말할 수 있다는 관찰의 성질이 여기에서는 두드러진다

 

그런 점에서 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만드는 일은, 어느 때보다 도시가 비밀로 가득 찬 현대에 적합해 보인다. 어차피 비밀을 강조할 필요 없이 비밀이 일상화된, 즉 익명화된 현대도시에서는 ‘이름 없음’을 고집하는 것보다 어떤 이름을 선택하느냐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대도시 안에서는 암호 장치가 설치된 문이 일방적이고, 모든 삶이 비밀로 돌아서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비밀을 만들거나 어떤 비밀에 대한 도전을 하는 것과 같은 비일상적인 판타지를 욕망하기보다는 어차피 비밀로 존중되고 있는 일상 자체를 판타지로서 즐겨보는 게 수월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양상 변화는 비밀과 익명성이라는 ‘이름 없음’의 공통점을 가진 두 낱말을 대조시킬 때 더욱 두드러진다. 비밀은 독자건, 도굴꾼이건, 파트너건 상대를 특정하면서 누구에겐 감추고 누구에겐 드러내는 의도성을 내포하지만, 익명성은 처음부터 누구도 알 수 없다며 모든 상대를 감춰버린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들을 감추려는 노력은언제나 들킬 위기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불안하지만, 익명성을 기반으로 중요한 것을 직접 내놓음으로써 상대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은 많은 선택의 기회를 갖는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어쩌면 익명성 없이 단 하나의 이름을 부여받았던 과거에, ‘비밀의 방’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지정된 이름으로 불려야만 했고, 그렇게 의도와 무관하게 짜여진 이름은 어느 누구와 만나건 꾸준히 사용돼야만 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관계가 친밀한 공동체 사회에서 그 이름에는 개인이 벌인 모든 자취가 축적되면서 옆집 사람이 누군가 이름에 덧붙인 편견이 앞집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고, 실제 이름 주인의 선호와 무관하게 그 이미지는 각인되었을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지정되어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는 이름에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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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효진, <낙원캐슬>, 펜드로잉, CG 꼴라쥬, 2012



도시의 익명성은 이 불가능성을 뒤엎어 준 축복인 셈이다. 오로지 상품 거래만이 중요한 도시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겨지던 이름 또한 상품으로 간주되면서 개인의 관찰과 선택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 평생 옆집과 앞집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닌, 잠깐 필요에 따라 만났다 헤어질 사람들에게는 이전과 같이 ‘완전한 이름’도 ‘비밀’도 요구되지 않는 것이다. 필요한 상품을 고르고 구매하듯 원하는 관계에 알맞은 이름을 찾아 소비하면 그뿐, 익명의 공간에서는 각자 필요한 이름을 꺼내 들어도 아무도 개의치 않게 해주었다. 단 하나의 이름을 위해 스스로를 조정할 필요도 없었고, 자신을 ‘꽃’으로 불러줄 이름을 찾을 희망도 기대하지 않았다. 상품가치를 저울질하듯 필요에 따라 이름을 조정했다.

이제는 구태여 판타지 세계를 염원하지 않더라도 시시각각 꽃이 될 수 있고 아이스크림도 될 수 있고 나비도 될 수 있다. 익명성을 통해 우리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이름을 선택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과거에 무턱대고 쓰이거나 숨겨야 했던 이름보다 훨씬 합리적이게 되었다. 익명성의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정말 내가 원하는 나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이라는 상품은 개인을 더욱 진실하게 해주었다.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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